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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에 관하여

세계정복은 가능한가


이 책을 처음 알게 된 건 딴지일보의 이 글(http://www.ddanzi.com/ddanzi/section/club.php?slid=news&bno=50378) 을 보고 나서였습니다. 척 보기에도 재밌어 보이더군요. 애니메이션을 비롯한 만화, 영화 온갖 문화매체 전반에 등장하는 나쁜 놈들이 세계정복을 하는 이유와 그 가능성, 세계정복 방법, 세계정복 이후 등에 대해 지면을 할애하고 있습니다.

작가부터가 오덕왕이란 칭호로 불리길 원하는 굴지의 애니메이션 기업 설립자(가이낙스)인만큼 그런 계통의 이야기가 주류라 별 관심 없는 사람으로서는 은근히 많은 오덕용어(?) 주석 일람에 좀 질려버릴 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 저만해도 이거 다 챙겨읽는게 꽤 지루해보였지만 번역자가 이런 주석에조차 상당한 개그센스를 발휘해가며 실어놓았기에 생각만큼 지리한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재밌더군요 바벨 2세를 '방자한 청소년이 노력하는 어른을 못살게 구는 나쁜 내용.' 으로 표현하는 식입니다.

자 그럼 악의 무리들이 과연 세계를 손아귀에 넣고 마음 가는대로 굴려대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작가는 이게 얼마나 험난한 일인지 -_- 많은 예를 들어 설명합니다. 그 중에서도 작가가 특히 중요시하는 부분으로 눈여겨지는게 바로 조직의 존속입니다. 악의 조직이랍시고 조직 내에서도 나쁜 짓을 일삼았다간 안 그래도 나쁜 놈들인 부하들이 배신이나 도망을 하기 일수고 이런 부하들을 부리려면 공감할만한 이념과 비전을 제시해야하며(같은 인간이 인류 몰살같은걸 캐치프레이즈로 내걸면 엥간해선 신입이 안 들어오기 마련입니다.) 이들을 부릴 인건비마저도 값싸지 않은 것입니다. 그렇다고 밖에서는 온갖 악행을 저지르고 조직 내에서는 선하고 자비로운 모습을 보여주면 그게 과연 악의 조직인지에 대한 모순이나 의문이 생기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세계정복이 끝나면 뭘 할건가? 과연 지배라는 것의 개념과 의의는 무엇인가?'가 바로 작가가 던지는 화두입니다. 세계를 좌지우지하는 악의 대마왕으로서 성공하면 과연 행복할 것인가? 비록 세계정복이 가능하더라도 과연 그게 현실에서도 마음에 흡족할 것인가?

이런 물음에 대해 작가는 지배라는 개념부터를 명확하게 정립하여 이야기하기 시작합니다.


세계 정복이라는 말을 쉽게 쓰지만, 정복이라는 것은 '정복할 가치가 있는 상대'를 정복해야만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정복에 의미가 있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예를 들어 우리들 인류는 달팽이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달팽이들이 제아무리 무리를 지어서 몰려와도 인류에게는 당해낼 수가 없습니다.[각주:1] 달팽이들이 제아무리 무리를 지어서 몰려와도 인류에게는 당해 낼 수가 없습니다. 달팽이가 살지 죽을지는 우리들 인간의 손가락 하나에 달려 있습니다. 달팽이에 대해 우리들은 절대적인 권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들은 달팽이를 지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떠십니까? 이런 말을 들었을 때 여러분의 마음속에서 기쁨이 솟아오르십니까?
  '정복자'로서, 마음속 깊은 곳에서 스며 나오는 웃음 때문에 입 꼬리가 살짝 올라가는지요?
솟아오를 리가 없겠지요. 달팽이 가지고는 안 됩니다.
  시골에 살고 계신다면 집에서 닭을 몇 마리 키우는 분도 있을겁니다. 그분들은 닭을 지배하고 있는 셈입니다. 농가라면 몇십 마리씩 기르고 있으시겠지요.
  "너희가 키우는 몇십 마리의 닭은 전부 네 지배하에 있다. 즉, 너는 닭을 지배하고 있다!"
  그런 소리를 들어봤자 하나도 기쁘지 않을 것입니다. 닭을 지배하고 있다고 해봤자 현실에서는 '닭을 보살피고 있는 것' 뿐이니까요.
  햄스터를 키우고 있는 사람은 '햄스터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햄스터를 보살피는 것' 뿐입니다.
  이거 참, 이렇게까지 구구절절 쓰지 않아도 벌써 충분히 알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우리들 인류라는 것은 이미 인류 이외의 모든 동물을 지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매일같이 빙글빙글 웃거나, 번개 치는 밤에 와인글라스를 손에 들고 '우하하하, 불쌍한 달팽이들..' 같은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 본문 51p~53p 중에서.

작가는 결론적으로 현대 세계에서 지배라는 것은 지배라 쓰고 보살피기라 읽는다는 것밖에 안 된단다는 것을 지적합니다.

게다가 현대 사회에서 부의 독점과 풍요란 단순히 물질적인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흔히 대중문화라 불리우는 많은 것들이 대다수 많은 소위 양민들 -_- 의 경쟁과정에서 탄생하기 때문입니다. 10억원짜리 티켓을 산다고 해서 보통 스타워즈보다 10배 더 재밌는 스타워즈를 볼 수 없습니다. 아니 그런게 있다 해도 작가는 그 10억원짜리 티켓이 인터넷에 나돌아 돈 많은 자의 전유물이 되리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행위를 가로막았을 때 이러한 문화라는 것은 절멸하고 맙니다. 단적인 예로 책 속에서 북한을 언급합니다. 북쪽 나라 김씨 왕조의 권력자는 할리우드 영화를 비밀리에 들여와 개인적으로 보고 있지만 북한같은 억압된 세상에선 이러한 문화가 힘만으로 탄생할 수 없습니다. 김정일이 아무리 돈이 많아도 북한같은 나라에서 김정일 취향에 맞춘 할리우드 영화같은 수준의 것을 생산할 순 없습니다.

이러한 문화가 이미 깊숙이 자리잡고 소비하는 개념의 하나가 되었을 때 이 또한 풍요와 부의 가치에 편입됩니다. 지배라 쓰고 보살피기라 읽는 행위를 허술히 했을 때 결과적으로 이러한 풍요는 감소하게 됩니다. 물론 돈이 문제가 아니라 그저 세계에서 제일 강함을 인정받고 싶다거나 그냥 인간이 싫어서, 세상을 악의 제국으로 바꾸려고 등의 여러 형태가 있겠지만 책에서 이러한 유형 하나하나를 살피면서 과연 그게 가능한지를 묻습니다. 과연 늙어서도 세계를 다스릴 것인가 세계를 정복하면 그간 같이 고군분투해온 악의 조직에서 파벌이 생길지도 모르며 후계구도에 지장이 없겠는가? 2인자가 1인자를 3인자가 2인자를 배신할 기회를 또 노리진 않겠는가? 이런 틈이 생기면 또 다시 정의의 용사들이 나타나 만화처럼 악당들을 몰아낼지도 모를 일이고..

작가가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악의 조직 이야기를 신나게 풀어놓다가 어째 뒤로 갈수록 사회현상과 역사에 이르는 이야기가 중심이 되느라 책이 산으로 가는 듯 한 부분도 있습니다. 어쨌든 '악'과 악을 저지르는 '나쁜놈'의 개념조차 시대별로 다르고 현대에서는 특히나 더 선악의 구분이 모호해지는 면도 있기에 무작정 악당이 되는 일도 쉽지 않습니다. 작가는 '악'이란 현재의 세태와 흐름에 반하는 흔히 말하는 대세에 역류하는 것으로 정의하면서 현대 세계에서 악당이 되려면 어른을 공경하고 인터넷을 끊고 영리보다 비영리를 추구할 것을 주장하며 책을 마칩니다. 개인적으로 이 이야기는 그다지 공감이 가지 않기도 하는군요.

그렇지만 책 자체가 워낙 재밌고 또 악의 조직을 운영하는 과정에서 본받을 점이 많은지라 -_- 참 좋았습니다. 어찌보면 실용서로 분류될만큼요. 그러고보니 이 책을 발견한 도서관 서가가 그 쪽 분야이기도 했던것 같네요. 온갖 문화코드가 등장하느라 주석 읽어서 일일히 따라가다 보면 덕력이 증가한 듯한 기분이 드는건 보너스..라기엔 기분 탓일거에요 아마.


↓ 이건 책 내 삽화를 그린 굽시니스트님의 소개 만화. 위의 딴지일보 링크에 있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또 인상깊었던 구절이라면..



  훔쳐 온 무기만 가지고 세계 정복을 하는 건 역시 무리입니다. 일단 훔친 것이니까 수량도 한정되어 있고 평범한 무기밖에 얻을 수 없습니다. 전 세계 그 누구도 알지 못하는 필살 병기가 가지고 싶겠죠? 넘치는 연구비를 건네주면 기뻐서 금단의 병기를 개발할 과학자가 의외로 많을지도 모릅니다.
  단, 애니메이션이나 특촬 방송에 많이 나오는 전투 로봇을 만들게 한다.'는 것은 현실성이 없습니다. 저 북한도 대포동 미사일이나 핵무기 같은 것은 개발했지만 로봇은 개발하지 않고 있습니다. 남미나 중동에 있는 정치권이 불안한 나라, 유럽의 민족 분쟁이 격렬한 지역에서도 게릴라들이 과학자를 납치해서 거대 로봇을 만들고 있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이 없습니다.
  거대 로봇이라는 것은 그 정도로 '쓸 데가 없는 것' 같습니다. '우리 조직에도 거대 로봇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은 알겠습니다만 세계 정복을 할 때에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꿈보다 현실성입니다. 거대 로봇은 포기하는 쪽이 좋을 것 같습니다.

- 본문 112p~113p 중에서.

하지만 가슴속에 품은 세계정복이나 우주정복이나 10반 정복같은 것은 현실보단 로망이잖아요. 로망이라구요! 노망 말구요.




  1. 이런 부분에 대한 견해를 확실히 하자면 전 달팽이가 백만마리쯤 몰려오면 그냥 도망다니지 싶은데 말이죠. -_- 백만마리도 많고 30마리만 무리지어 몰려와도 냅다 달아날 듯. [본문으로]